[3·1운동 유적지를 가다] 제주 조천·법정사·세화장

2019-02-24 08:13:19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1일 오전 제주시 조천읍 만세동산 일대에서 기미독립운동 96주년 기념 제23회 조천만세대행진이 열린 가운데 참가자들이 3·1독립운동기념탑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2015.3.1. bjc@yna.co.kr

전국 곳곳에서 일제 통치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벌이던 그 시절, 바다 건너 남쪽 제주도에서도 다른 지역에 못지않게 가열찬 항일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제주에서는 법정사 항일운동(1918)과 조천만세운동(1919), 해녀항일운동(1931∼1932) 등이 3대 항일운동으로 꼽힌다.


◇ 서울서 품고 온 독립선언서 처음 낭독한 '조천만세운동'
1919년 제주 출신으로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유학생이던 김장환(당시 17세)은 탑골공원의 만세 시위에 가담한 후 고향 제주도까지 3·1운동의 불씨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미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제주에 온 그는 숙부 김시범 선생을 찾아가 3·1운동 상황을 이야기했다.

이를 들은 김시범은 제주에서의 만세운동을 결심, 14인의 동지를 결성해 제주 유림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했다.

거사일인 21일 조천리 미밋동산(만세동산)에는 14인의 동지와 23인의 거사동지, 주민과 인근 마을 서당생도 등 150여명이 모였다.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이들을 본 주민 500여명도 동참하면서 행렬은 더욱 확대됐다.

이들은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꽂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만세 행진을 했다. 이들은 제주 성내까지 행진하려 했으나 조천 신촌리에서 경찰과 충돌했고, 여기서 김시범 등 13인이 체포됐다.


이어 22일과 23일에도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며 2차, 3차 만세운동이 벌어졌고 24일에는 조천 오일장날을 맞아 장을 보러 나온 부녀자들까지 합세하며 1천500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만세운동이 전개됐으나 시위 주역들이 체포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나흘간의 조천만세운동으로 총 29명이 기소됐다. 핵심 인사 14명은 거사 모의, 시위 주동, 태극기 제작 등의 혐의로 징역 8개월에서 1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조천 만세운동은 이후의 제주 민족운동에 많은 영향을 줬다.

매년 3월 1일 미밋동산에서는 조천만세운동을 재연하는 조천만세대행진이 펼쳐진다.

행정당국은 1995∼2003년 조천 만세동산 성역화 사업을 벌여 추모탑과 육각정만 있던 이곳에 제주항일기념관, 독립유공자 묘역, 기념광장 등을 조성했다.


◇ 스님들이 주도한 '법정사 항일항쟁'
3·1운동보다도 5개월 먼저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은 1918년 당시 법정사 주지 김연일을 비롯해 강창규, 방동화 등 승려들이 주도해 이뤄졌다.

이들 스님은 항일운동 계획을 구체화하며 신도들에게 반일의식을 고취했고, "제주에 거주하는 일본관리를 소탕하고 일본인을 추방하자"는 격문을 각 마을에 배포하며 주민들을 결집했다.

거사는 1918년 10월 7일 이뤄졌다.

선봉대를 필두로 마을을 돌며 모인 세력은 경찰 중문주재소를 습격, 물건을 때려 부수고 불을 질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연락을 두절하기 위해 전선을 절단하기도 했다.

이 무장항쟁의 참여자는 약 700명으로 추정된다.

이 운동으로 66명이 검찰에 송치됐고, 재판 전에 2명이 옥사했다. 재판에서는 31명이 최고 10년에서 최하 6개월의 징역형, 15명이 벌금형, 18명이 불기소 처분을 각각 받았다. 징역형을 받은 사람 가운데 3명은 옥사했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사이비 종교인들에 의한 난동 사건 등으로 왜곡했으나 1990년대 들어서 진실이 밝혀졌다.

김연일 등 법정사 항일운동 참가자 28명에게는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법정사는 당시 일제의 보복으로 불에 타버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행정당국은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를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했으며, 항일항쟁터 성역화 사업을 통해 법정사의 잔해 등 유적을 보존하고 일대에 추모탑과 의열사 등을 세웠다.


◇ 경제적 수탈에 항거, 여성 주도 '해녀항일운동'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 남쪽에는 해녀항일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이 일대는 1932년 일제의 수산물 수탈에 맞선 해녀 항일운동 집결지였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1931∼1932년 구좌, 우도, 성산 등 제주 동부지역 해녀 1만7천여명이 238회의 시위를 벌여 일제 식민지 경제수탈 정책에 항거한 국내 최대 여성 항일운동으로 꼽힌다.

1900년대 들어 일본 무역상들이 등장하며 해산물의 가치가 상승, 해녀 일이 제주경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됐고 수탈과 노동력 착취 등의 폐단도 확대됐다.

해녀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1920년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설립됐으나, 일제 치하에서 되려 각종 수수료와 수당을 수탈하는 조직으로 변질했다.

불만이 커지던 와중에 1930년대 들어 성산포 해초 부정판매 사건과 하도리 감태·생복(날전복) 가격 조작사건 등이 발생, 반발이 일기 시작했다.

가장 큰 시위는 1932년 1월 12일 세화장에서 열렸다. 해녀 수백명이 호미와 빗창을 들고 당시 제주도사 겸 제주도해녀어업조합장에게 달려들었고, 도사는 결국 해녀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답이 오지 않자 민심이 들끓기 시작했고 경찰이 시위 관련자 체포에 나섰지만, 해녀들은 발포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대항했다.

이로 인해 해녀 다수가 검거됐다가 하도리의 부춘화·부덕량·김옥련 등 3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됐다.

해녀항일운동은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외면받다가 2003년에 부춘화·김옥련 해녀, 2005년에 부덕량 해녀가 각각 건국포장을 받는 등 현재까지 해녀항일운동 관련 11명이 국가유공자로 선정됐다.


atoz@yna.co.kr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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